PARK MIRA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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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포박한 의식의 이미지,

관조적 태도와 비유의 언어들

 

                                                                                                                              홍경한(미술평론가)

 

박미례 작가의 작품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2016)에는 다양한 해양사물들이 등장한다. 거대한 항공모함과 작은 배, 소라고둥과 종이배, 별과 어선들이 늘어서 있고, 일렁이는 파도가 이들을 감싸고 있다.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 엿보이는 거친 화면은 폭발하듯 세찬 기운으로 등장사물들과 함께 역동적인 흐름에 의탁하고 있다. 억세면서도 묵직한 인상의 그림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외할아버지가 긴 시간 머물렀던 바다에 대한 나의 사색들은 여러 이미지가 중첩 되며 등으로 도상의 가지들이 자유롭게 뻗어 나가며 휘몰아치듯 완성하게 되었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즉,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 연작은 어부로 살다 작고한 외조부를 추모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그림을 ‘진혼화(鎭魂畵)’라고 칭했다.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도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는 평생 당신의 업이자 삶의 밑동이었던 바다를 배경으로 생계와 생존을 의탁했던 삶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밤하늘의 등대역할을 했던 별은 꽤나 낭만적이지만 서로 다른 배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치열한 공존의 바다, 인생의 터전에서 밀리거나 혹은 밀려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면의 일렁거림, 요동하는 조형요소들의 움직임만 봐도 외조부의 삶의 여정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 그림을 기억의 소환 혹은 환류로만 해석하는 건 단편적이다. 오히려 ‘기억풀이’에 작가의 시선이 덧대어짐으로서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특징이다. 다시 말해 외할아버지를 통해 작가가 느꼈던 감정과 회상을 토대로 다양한 층위의 작가적 사유들을 복합적으로 투사하고 있음에 방점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미지의 바다, 희생의 바다, 낭만의 바다, 모험의 바다, 투쟁의 바다, 생계의 바다로 적시하고 있다. 바다라는 단어를 뒷받침하는 여러 심상들이 얽혀 있는 구분이다.

허나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가 남다를 수 있는 부분은 무엇보다 동시대로의 치환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이 작품은 어떤 개인의 사변적 스토리를 넘어 나와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자화상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린 저 넓고 깊어 속조차 알 수 없는 해양과 별다름 없는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하루하루를 투박하게 또는 맹렬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숨 가쁜 일상에서 치이고 밟히며 내 자리 하나 지키거나 얻기 위해 투쟁하듯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가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궁극의 메시지인 이매진(Imagine)은 아직 먼 얘기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선 <천국과 지옥사이(Between heaven and hell)(2014)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재밌게도 전신이 아닌 동물들의 머리만 그려져 있다. 그의 그림 속에 자주 출현하는 사슴을 비롯해 양, 곰, 사자 등이 한 화면에 어우러져 있으나 몸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흡사 스냅사진처럼 도상들은 멈춰 있으며, 그렇기에 언뜻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만발한 꽃과 동물이라는 명사가 전하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한 장면처럼 자연생태계의 흔적들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동물들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고 공기의 흐름은 건조하다. 눈동자가 없다는 건 영혼이 없음을 가리킨다. 그런 이유로 그림 전반의 둔탁함만큼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배어있다. 물론 양육강식의 최상위 포식자들과 초식동물들이 한 자리에 들어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감지되고도 남는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사이> 역시 현대인들의 삶과 등치를 이룬다. 주관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흡사 기계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 소비되는 인간들과 동물들의 영혼 없는 눈동자는 과연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되묻게 된다.

2016년 작품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에서의 속성이 그러했듯 <천국과 지옥사이>에서도 힘의 지배를 받으며 뺏기고 빼앗기에 급급한 채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여백 없이 퀭한 얼굴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오늘을 그리고 있음이 읽힌다. 그림 속 동물이나 우리나 매한가지 처지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천국과 지옥사이>는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결국은 동일하게 불안한 생태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은 그의 또 다른 동명의 작품 <천국과 지옥사이>(2012)에서 확연히 극대화된다. 캔버스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자릴 잡고 한쪽엔 사슴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역시 화면은 거세게 휘몰아치고 붓질 또한 얌전하지 않다. 특히 고개를 튼 채 울부짖듯 묘사된 사슴은 그 자체로 시각적 정체를 해체하고 인간으로 대리되는 심리적 불안감으로 작동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화면 하단에 무리지어 있는 백조들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야말로 이미지와 표현에서 실존의 틀이 한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동시대인들을 진중하게 교차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미례의 그림들은 냉정하고 무섭다. 뭔가 들키면 안 되는 것을 들키듯, 거짓 평화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실체를 읊조린다는 것에서 특히 그렇다.

이번엔 시선을 옮겨 그의 영상작품을 보자. 충북 청주미술창작 스튜디오에서 아티스트 릴레이전의 일환으로 지난해 12월 개최된 전시제목과 동명의 비디오 작품 <기계는 고물이 되고 사람은 퇴물이 된다>(23분 05초, 2016)는 일상의 사물, 자연물과 인공물, 동물들의 생활상이 다양하게 그리드 된 영상물이다. 작가는 이를 시적(詩的)으로 보이도록 작업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작품에서 시-적인 느낌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자유시인지 서정시인지 갈래는 모호하고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에 대한 궁극적 성격 또한 희미하다. 워낙 다양한 내러티브가 들어 있어 성격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은 시 혹은 시-적이라기 보단 옴니버스식 미니 다큐에 가깝다.

작가는 이 작품의 내용과 구성에 대해 “큰 맥락은 세상 만물의 소멸과 생성에 대한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 속에 얽혀있는 구조의 부조리함을 드러나도록 구성하였다.”고 말한다. 필자의 판단에 이 진술은 진실하다. 그가 이전 회화들, 다시 말해 <박제짐승>(2012-2014) 시리즈를 비롯한, <기사>(2014), <접시꽃>(2014) 연작에서 드러나던 순연의 자연과 인위적 환경의 불화합 및 생존성과 존재성 등을 세상사를 통해 펼쳐놓았던 히스토리와 상당히 부합한다는 것이다. 정리된 영상이 아니기에 어딘가 기술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감의 무게는 유효하다. 왜냐하면 우린 누구나 박미례가 말한 구조의 부조리함, 세상 만물의 소멸과 생성을 느끼며-체감 및 공감하며-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기계는 고물이 되고 사람은 퇴물이 된다>에는 어떤 서사가 드리워져 있을까. 첫 장면은 작가의 고향인 속초를 연상케 하듯 시원한 바다의 일렁임으로 시작한다. 이어 바닷가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오징어, 게, 물고기가 담긴 수족관이 등장해 작가 개인 기억의 미로를 탐색한다. 다음 장면에선 빽빽하게 자리 잡은 어느 도심의 한 공간을 보여준다. 그곳엔 길고양이들 천지다. 구르는 고양이 낮잠 자는 고양이 어딘가 응시하는 고양이 등등, 길고양이들의 일상이 전봇대 위 까마귀와 까치의 대비 아래 천천히 펼쳐진다.

그 다음에는 그들(고양이)의 안식처이자 인간 삶의 기본적인 터전인 주택이 재개발에 의해 허물어지고 카메라는 서울 도심의 어느 거리를 무심하게 비춘다. 한편에선 과거 클럽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며 동시에 무더운 여름을 나는 동물원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후 영상은 건축물에서 하늘, 꽃밭, 터널로 이어지더니 성소수자를 둘러싼 시위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곤 락페스티벌의 한 장면과 촛불집회 장면이 교차되며 불꽃놀이로 마무리 된다.

<기계는 고물이 되고 사람은 퇴물이 된다>가 보여주는 형식은 일상성을 근간으로 한다. 소소한 보편적 기록이면서 시간에 관한 내레이션을 관통한다. 그것은 작가가 밝힌 것처럼 관찰자로서 세상을 향한 소시민적 관조자에 가깝다. “현재 삶 속에서 몸소 지각하고 감성하는 것들을 은유적 재현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익숙하다. 회화 작업과 드로잉은 본능과 직관에 의한 빠른 몸짓들로 화면을 전개하며, 연출되지 않은 촬영을 통해 현 사회 공간을 그대로 영상에 담는 작업이다.” 다만 회화적 언어로서 기능하던 이미지가 유동적인 언어로 탈바꿈했고, 이 유형의 언어는 작가만의 논리, 수사, 철학이 더해지면서 메시지가 담긴 이미지로 탈바꿈했다는 차이는 있다. 물론 그 이미지는 단지 어떤 기호가 아니라 작가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험적 원형이요, 지근거리에 놓인 보편적 삶의 태제다.

특히 그 내부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만의 정서가 녹아 있으며 이것이 여타 영상작업과의 변별점을 부여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의 영상엔 거창하지만은 않으나 분명히 우리 곁에 서성거리는 삶의 지층이 포개져 있다는 것으로, 이게 참으로 단선적으로 침투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담담하게 포착한 현실성, 삶을 잠식하는 모순과 궤변, 억지와 합리를 가장한 이기 등이다. 이타성이 배제된 사회와 차가운 시스템, 그 안에서 소외받고 외면 받으며 스스로마저 자발적으로 등져야할 다양한 감정들-희로애락이 투영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질서 없는 질서 속에 안착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회화작업과 영상작업은 보이지 않는 맥락을 공유한다. 일관된 시선이 그렇고 거센 듯 투박하게 전개하는 조형형식 면에서도 둘은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가 말한 것처럼 ‘세계 내에서의 화두’라는 지점도 회화와 영상의 근친성을 지정한다. 따라서 박미례와 퐁티에게 있어 세계는 미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모든 관계의 원천이며, 예술은 세계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인 셈이다. 즉, 그의 예술은(회화든 영상이든)세상을 열람케 하는 작은 단서들, 시간을 지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한편 필자는 그의 일련의 작업들을 보며 실존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한다. 산자가 죽으면 남는 건 기억이요, 기억조차 시간에 비례해 망각의 결을 지닌다.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가 그렇고 <기계는 고물이 되고 사람은 퇴물이 된다>가 그러하듯 존재란 언젠가 개념만 남은 채 서서히 우리 정신에 자릴 비워준다. 이는 인간의 실존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장 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주장과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박미례의 작품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이와 같은 흐름이 곳곳에 부유한다. 그것은 관조적 태도와 비유의 언어들, 그 일상에서 포박한 의식의 ‘이미지’들이다.

박미례의 그림에서도 이미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내용을 몰라도 시원스럽게-퍽퍽하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시공적 화면을 포함해 그의 동물이나 꽃 등의 이미지는 의식으로서의 이미지, 존재성에 관한 이미지 외에도 경험의 복사, 지각작용에 의해 이룩된 형상이 조형적 수단에 의한 재현의 이미지로도 나타난다. 이때의 이미지들은 사물과 현상, 기억과 이성의 한 형태로 회화에 있어 추상성을 구체화시키는 일종의 비유 언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일례로 그의 회화는 한 화면에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그려진 오랜 시간의 결과물이며, 때문에 이미지는 기표적인 대상이 아니라 메타포와 상징을 담은 의미체이다. 반면 영상작업과 같은 동적인 이미지는 순간의 기록이고 순간의 연속으로서, 실시간의 흐름을 좇아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되는 서사체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듯)이들 이미지는 양자 간 연속성(맥락)에 근거해 다양한 의미작용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미지는 단순한 도상이나 그림이 아니라 사회학적 접근, 의미론적-기호학적 해석과 독해에 따라 매우 다양한 층위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박미례의 작품을 보며 뭔지 알 수 없는 동질감 혹은 공명의식을 체감하는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1)존 레논의 이매진 중 다음과 같은 가사를 음미하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Imagine no possessions”,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그렇다면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Nothing to kill or die for”

2)이와 관련해 작가 역시 “삶의 제도작동 원리, 생과 사의 아이러니. 덧없이 스치는 '살아있는 오늘'의 아픔과 슬픔, 기묘한 삶의 현재 등, 화면에 등장하는 생명들은 아름답고 훌륭한 자생적 자태를 보여주기도 하나 평화롭고도 난폭한 치열의 양육구조 속 세상사 만화경을 담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

3)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의식이다’라는 표현은 사실 실존철학의 대부 사르트르가 31세의 젊은 시절, 처녀작 <상상력>에서 이미지는 사물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갈파한 것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정의를 고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에피루스 학파에서부터 17,18세기 형이상학자들을 거쳐 현대 심리학자들과 후설에 이르는 서양 철학사상속에서 상상력, 혹은 이미지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뒤 내렸다.

4)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는 그의 저서인 <지각의 현상학>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것은 지각의 현상학으로, 모든 지식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얻은 것이고, 예술은 세계를 탐구한 결과이며, 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인지가 아니라, 본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를 가리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