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례 개인전

괴작 서문

 

함성언 (갤러리 버튼)

 

 

인구 천만의 이 거대한 도시는 도무지 잠 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잠이 들 무렵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삶이 있고,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을 무렵 소리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삶이 있다.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삶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천만 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이 도시를 만든다. 문제는 이 천만 개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하나의 공간에 배치시키고 또 그것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시작된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도시는 몇 번인가의 전란을 거치며 처음 설계될 때와는 다른 형태로 팽창하기 시작했고, 그 속도는 도저히 설계 당시의 철학과 기술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렇게 도시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다른 삶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는, 배치의 철학과 이유에서 철저히 배제된 이야기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체로 도시 빈민의 삶을 살게 된 그 이야기의 주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팽창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도시 운영 시스템으로 통칭되는 배치와 운영의 철학과 기술의 틈을 이용해 먹고 사는 것뿐이었고 그들의 삶이 그 시스템에 흡수되거나 그에 걸맞은 형태로 진화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그냥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며 평생 부러워만 하다 이야기를 끝내거나.

 

시스템이란 그런 것이다. 마치 톱니바퀴 같아서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내미는 곳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더하고 쳐내고 재단하면서 남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을 끌어 안는다. 안정되면 관대하지만 안정되기까지는 냉혹하다. 오직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가능한 안정되기 위해 서서히 그러나 가차없이 불필요한 것을 쳐낸다. 눈과 귀가 두 개, 코와 입이 하나씩 달린 사람의 얼굴도, 각각 다섯 개씩인 손가락과 발가락도 그렇게 서서히 그러나 가차없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화라고 불렀고, 또 누군가는 놀라운 신의 섭리라고 했다.

 

아무래도 신뢰하기 어려운 신의 섭리에 의한 창조론 같은 얘기는 접어두자. 그렇게 되어야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진화의 과정과 그것에서 비롯된 생존의 냉혹함을 통해 여기 우리와 주변의 삶이 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용도폐기 된 학설이지만, 그것이 여전히 사람들을 흔드는 이유는 여러 진화론의 학설들 가운데 유독 그것이 관념적이고 감성적이기 때문이다. ‘내적인 욕구가 형질로 표현된다.’는 그의 이론은 ‘나는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라거나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나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랜, 그러나 사실은 헛된 믿음을 자극한다. 흔한 표현으로 ‘시스템에 함몰된’ 삶을 사는 주제에 그나마 꿈 꿀 여지가 있다는 걸 억지로 믿는 모양새다. 사실은 모자라고 불필요한 것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론이 정설인데 인간은 아직도 꿈을 꾼다. 인간만 그렇게 믿는다. 결국 자연이 선택했다 또는 자연에 의해 도태되었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진화의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인간은 외면하려 애쓴다.

 

박미례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과 접시꽃은 그런 인간의 대척점에 서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을 거치는 동안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적응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온 몸으로 안다. 그렇게 우제류는 짝수의 발굽을 얻게 되었고 뿔을 남겨놓게 되었다. 그렇게 토끼는 큰 귀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접시꽃은 크고 화려한 꽃잎을 얻게 되었다. 효율과 편의에 의해 결정된 외형은 완벽한 균형을 갖게 되는 대신 강한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단련과 훈련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거나 완전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뺏기게 된다. 그것은 환경, 즉 시스템이 결정할 문제다. 시스템이 허락할 때 동물은 지금과 다른 형태를 갖게 될 수 있게 된다. 결정권을 가진 시스템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박미례의 작업은 단순히 동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게 만든 시스템의 역사와 흐름의 재현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리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존재(대체로 동물로 표현되는)에 대한 인식으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그 역사와 흐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볼 것은 작업 안에 그리 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 대신 시스템에 적응한 그들에 대한 이해와 나아가 동경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본능과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이 복잡하게 뒤얽힌 사고의 결과물로 보인다. 강력한 뿔도 이빨과 발톱도 없고 비슷한 크기의 동물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근육 효율을 가진 이 이족보행이 가능한 영장류는 본능적으로 더 강하고 빠른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의 여지없이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는 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그녀의 작업은 그저 멋있게 그려진 도감의 일러스트에 그쳤을 것이다. 박미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강제된 형태의 미감과 그리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작업에 표현한다. 동물과는 다르게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식량을 쟁취하고 종족을 번식하는 인간 역시 강력한 뿔과 발톱을 가질 수 없었기에 갑옷을 두르고 동물을 길들여 올라타, 사자의 발톱을 닮은 강철의 칼과 창을 들고 싸우지 않았던가. 결국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형태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화되며, 그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가장 효율적이고 균형 잡힌 미감을 획득하게 된다는 이 명료한 사실이 박미례의 작업 안에 있다.

 

그래서 박미례의 작업은 동식물의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결국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그녀의 작업은 인간이 속하고 살고 있는 이 시스템이 지금 우리를 어떤 형태로 강제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화시킬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시스템이 어떤 형태를 선택하고, 도태시키게 될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동물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선택을 받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의 합의를 통해 시스템을 새롭게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수많은 사건으로 뒤덮인 2014년의 대한민국에 그토록 시스템의 부재라는 말이 자주 들렸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음에도 바꾸지 않은 인간들과, 주어진 시스템에 적응하여 선택 받거나 도태되는 과정을 통해 얻은 형태 그대로 살고 있는 동물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믿게 되는 것일 게다. 결국 이 소와 치타와 접시꽃과 온갖 동물의 두골은 정확히 우리의 초상이거나 자화상이거나 우리 동네의 풍경화다.

 

 

PARK MIRAE

ARTIST

 

© 2020 Parkmira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