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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 drawing 무작위의 기술, Oil on canvas, 203 x 107cm, 2018 © Parkmirae
Random drawing 무작위의 기술, Oil on canvas, 203 x 107cm, 2018 © Parkmirae
DRAWING
Detail View _ Passed down from Grand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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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춤을 추어라
김현주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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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례 참 징글징글하다. 자신의 ‘괴작(怪作)’을 아우르기 위한 소개에 앞서 횟집 수족관 새우, 오징어, 횟감 물고기들을 영상으로 기록한 〈Aquarium〉(2008)을 선택하는, 소위 악취미로 보일 법한 접근을 하는 것부터 말이다. 그것도 어부셨던 외할아버지가 하신 “오징어는 성격이 나빠서 죽으면 빨리 건져야 해. 죽어가는 애가 살아있는 애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덧대며 말이다. 악취미라는 데에는 영상의 배경 음악으로 선택한 비틀즈의 〈Because〉도 한몫한다. “Aah/Because the world is round/It turns me on…(아아/세상이 둥글기 때문에/그것이 나를 흥분시킨다…)”라는 노랫말은 뻐금거리는 물고기의 입과 싱크를 맞추고 있다. 생전 이 좁은 수족관이 마지막 세계였을 생명들에게 둥근 세상이라니! 그 얼마나 독한 역설일까. 이 독함, 징한 독함은 두 눈 부릅뜨고 살아가고 또 그리는 박미례가 뒤집어 쓴, 혹은 박미례를 덮어씌운 점액질 같다. 축축하고 끈적이면서 비린데, 그게 바로 삶인 마냥 태연해서 징글징글하고 몸서리치게 된다. 박미례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녀가 다정하게 어깨 걸고 보여주는 삶의 면면에 대한 몸서리이기도 하다. ‘영매(靈媒)’를 자처하여 칼처럼 붓 쓰는 미례. 글의 본론은 박미례의 자기 소개에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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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례는 항상 자기 소개의 서두에 미례(美禮)라는 이름의 뜻풀이로, ‘미에 례를 바치다’라는 설명을 부가한다. 미래라는 이름은 어딘가 젊고 진취적이게 다가오는데 미례는 다소 구수하고 복고적으로 느껴질 법해서 우스갯소리이자 기억에 콕 남겨질 만한 소개 방식을 취하는 게다. 그런데 가만, ‘미에 례를 바치다’를 곱씹어보면 그 속에 정말 미례가 있고 그로부터 실마리가 될 세계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하다. 미(美)는 사전상에 “한자어는 그 구성상으로 볼 때, ‘양(羊)’자와 ‘대(大)’자가 합쳐진 것”으로 “미는 ‘큰 양’으로서, 양이 크면 살찌고 맛이 좋다는 뜻을 함축”한다. 바로 이 양을 바쳐, 즉 희생양을 통해 일으킨 문명이란 얼마나 인간적이었던가! “희생양이 죽음으로써 그를 죽인 자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그 희생양이 다시 살아났거나 아니면 진정으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희생양 인과 법칙은 아주 엄격하기 때문에 죽음도 그 법칙을 막지 못한다. 이 인과 법칙은 원인에 해당하는 그 희생양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희생양을 회생시켜 적어도 얼마간은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희생양의 대속(代贖)으로 얻은 질서는 사실 이처럼 마술적인 기저를 저 아래 숨기고 있다. 지라르의 언급처럼 “우리 문명의 정신분열증적인 면”을 감추려고 할 때마다 비린내는 성긴 봉합을 뚫고 후각을 자극한다. 후각이 무뎌진 자리에 청각이, 청각이 예민해진 자리에 시각이 동원되어, 자 이제 똑똑히 보아야만 한다. 매일 밤 매일 낮의 끔찍한 무차별을.
보라. 목도와 직시를 무르지 않는 박미례의 태도는 일찍이 《멀리서는 인간도 파리처럼 보인다》(OCI 미술관, 2012)나 《기계는 고물이 되고 사람은 퇴물이 된다》(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6)와 같은 전시 제목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괴작》(17717, 2014)과 《동물혼》(인디프레스, 2021)과 같은 전시의 경우에는 주제를 앞세운 방식에 가깝겠다. 박미례는 에두르는 방식에는 별 취미가 없다. 다만 본디 본인 이름처럼 (예술적) 영매로 분해 매듭이 되고자 한다. 박제 짐승 연작과 표본 연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획득하고자 취하는 가공할 위력의 인공적인 힘을 다시금 박제시킨다. 이 연작들을 마주하고서는 거듭 생각해야 한다. 도상을 읽어내기란 너무나 쉽다. 따라서 쉬운 숙제를 빠르게 풀고 난 후 오는 공허와 우울을 감내해야만 한다. 비린내를 맡고야 만다. ‘광기와 이상이 만나는 시체들의 전시장’, ‘침을 꽂아 서서히 죽이는 인간 교육의 장’을 목도하기란 나 스스로를 공모자 위치에 세우게 만든다. 2010년대 초반부터 유화와 병행하며 목탄으로 그린 여러 동물들은 2016년 반구대 암각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서 군상을 이루며 한데 모였다. 야생동물 수렵과 포경을 바위에 각화한 그림과 유사하게 보이는 〈바다가 할아버지로부터〉(2016)는 이전까지의 개별적 감응을 집약시켜 ‘풍요, 기복’을 위한 상징을 반복하고 있으나 박미례의 반복은 인간의 풍요와 기복에 깃든 절박함을 물리고 나머지 모두를 위령한다.
한편 동명의 유화 작품인 〈바다가 할아버지로부터〉(2016)는 곡진한 삶에 대한 애가(哀歌)다. 외할아버지와, 죽음의 격한 무상함을 마주하고서 나온 이 그림은 명태 오징어선을 필두로 항공모함, 유조선, 유람선, 목선, 범선, 종이배가 풍랑치는 바다를 에워싼다. 이 바다가 모험의 바다라지. 미지의 바다라지. 허나 생존과 죽음의 바다라지……. 그 전부터 직감했지만 〈바다가 할아버지로부터〉를 보고 확신했다. 박미례가 붓춤을 추는구나! 피 한 방울 그림 없이도 기어이 두텁게 진혼을 치루는구나! 하여 이 작품을 본 이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박미례와 바다가 인접했을 때 조성되는 무드가 특별히 있다. 근미래의 일이어서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알겠지만 그녀가 밤새 달려 남해에, 서해에, 동해에 다다랐다고 할 때마다 조만간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박미례가 바닷내 나는 마을 어귀에 당도해서 만난 접시꽃은 십여 년째 그녀에게 ‘한반도 해바라기’가 되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반드시 접시꽃일 필요가 있나 묻는다면 반드시 접시꽃이 아닐 필요도 없다. 다만 접시꽃으로 외연화된 한철 생명력이 뭉쳐 흐드러져 그림에서 생을 이어간다. 〈접시꽃〉 연작으로부터 반도의 들꽃들로 이행해 갈 예정이라고 하니 이 또한 기다린다. 기다리게끔 하는 이에 대한 힐난도 품어보지만 도리 없다. 이젠 익숙해서 자분히 기다리지만 그러다보면 《동물혼》에서의 〈젖소〉(2020)나 〈바비〉(2020)처럼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타격하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만난다니, 그보다 눈앞에 들이민다. 보라고, 똑똑히 보라고. 그리고 너 또한 희생양의 인과 법칙에 준해 살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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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다 보니 얼마든지 변화도, 갱신도 가능하겠지만 미래 계획에서 박미례의 계획은 반도의 물결과 반도의 허공 그리기다. 그 맹아는 《드로잉 페어링》(소마미술관, 2024)에 출품한 〈바다산〉 연작에서 찾을 수 있다. 바닷물결과 산의 리드미컬한 변주가 도드라지는 〈바다산〉 연작이 채비였다면 2024년 여름과 가을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에서 진행 중인 작품은 주저함을 물리고서 얻은 붓의 흐름이 더욱 유연해서 강력하다. 접신에서의 황홀경을 당장 내 것으로 알 리는 없으나 칼처럼 붓 쓰는 박미례의 세(勢)가 화면과 팽팽히 긴장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밀리지 않고 종종 이겨 먹기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기고 지는 게 대수냐 마는, 그림만큼은 뜻한 바대로 될 때 지독한 생사의 굽이굽이를 세상에 던져놓을 수 있지 않을까. 본인 안에서의 충전이 얼마나 걸리는지, 또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부디 힘내어 진귀한 산해경(山海景)을, 그 역작을 토해내 보기를. 그래서 이윽고 미례(美禮) 본연의 잔인함과 기괴함과 피비린내남과……하지만 그 속의 여린 내와 존재 자체로 곱고 보드라웠을 어린 것들과, 또 힘 센 것들 각기의 ‘추모화’를 내어주기를 바란다.
2021년 겨울, 박미례에게 전한 편지를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았다.
10년전에도 수수께끼같이 요원하게 다가왔던 미례의 작품들을, 바로 그 생경함을 피하려 하지 않고 부러 언어화하지 않고 가장 회화를 회화답게 그 즐거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펼쳐지는 그 장소에 두고 내가 다가갔어야 했다는 마음이 든다. 이 마음을 미례에게 전하고 싶었어. 다행히 미례는 괴작(怪作)이라는, 태양계보다 더 광활할 은하계 같은 시공간을 열어두고 어제 오늘의 소임을 해 나가고 있었구나…작가가 외롭지 않기 위해, 작가가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나 같은 이들이 그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그 말을 아직 전하지 못했음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래서 오늘 전하고 싶은 말은, 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있겠다는 다짐이다. 나 같은 이들이 더 있다.